금요일 저녁, 8년 치 데이터가 들어 있는 외장하드를 택배로 보내고 돌아왔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운 좋게 데이터를 복구한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똑같이 사용한다면 언젠가 또 같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구를 기다리는 동안 백업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부터 하나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백업을 하고 있지 않았다.
처음엔, 이게 백업인 줄 알았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외장하드에 데이터를 옮겨두는 걸 백업이라고 생각했다.

촬영하거나 녹음한 파일을 20TB 외장하드에 옮기고, 필요할 때는 그곳에서 직접 불러와 작업했다. 그런데 원본을 외장하드로 옮겨버렸으니, 복사본은 없었다. 외장하드에 있는 파일이 유일한 데이터였다. 그러니까 HDD 하나가 고장 나자 8년 치가 한꺼번에 사라진 거다.
백업이라고 믿었던 저장장치는 사실 커다란 작업용 저장장치 하나에 가까웠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파일을 그곳에서 직접 불러와 작업했기 때문에 HDD는 항상 컴퓨터와 전원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번 고장의 정확한 원인이 전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백업용 저장장치를 이렇게 계속 사용하는 건 내가 생각한 안전한 백업 방식과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대로 백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름대로 네 가지 기준을 세웠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서 앞으로 지킬 기준부터 정해봤다. 완벽한 백업 시스템을 한 번에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 네 가지를 목표로 조금씩 바꿔가기로 했다.
- 다양한 상황을 대비할 것
물리적인 충격이나 전기로 인한 손상뿐만 아니라 화재나 수해처럼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도 고려한다. 한 번의 사고로 모든 데이터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 백업용 저장장치는 평소에 분리해 둘 것
작업용 저장장치와 백업용 저장장치를 구분한다. 백업용 HDD는 필요할 때만 연결하고, 백업이 끝나면 컴퓨터와 전원에서 분리한다. - 복사본을 하나 이상 만들 것
백업 HDD 하나를 만드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다른 하나에서 복구할 수 있도록 이중, 가능하다면 그 이상으로 백업한다. - 가능하다면 장소도 나눌 것
HDD를 여러 개 만들어도 같은 장소에 보관하면 화재나 수해 같은 사고로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 당장 실천하기는 어렵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다른 장소에 복사본 하나를 보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평생 살면서 화재 같은 일을 얼마나 겪겠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랬다. ‘설마 고장 나겠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제는 설마를 믿지 않기로 했다.
네 가지 기준까지 정하고 나니 이제 방법을 찾을 차례였다. 여러 HDD에 같은 데이터를 저장해야 한다면 어떻게 구성하는 게 좋을까. 하나씩 복사해야 하나? 좀 더 편한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찾아보다 RAID라는 걸 알게 됐다.
RAID면 다 되는 줄 알았지
처음 봤을 때는 딱 내가 찾던 방법 같았다. 여러 HDD를 하나의 저장공간처럼 사용할 수도 있고, 구성에 따라 HDD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데이터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이거면 되는 거 아닌가?’
신나서 장비부터 찾아봤다.

여기에 HDD 7개를 넣어 RAID 6으로 구성하고,

SSD 4개는 RAID 0으로 묶어서 빠른 작업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백업도 해결하고 작업 속도도 빨라지고. 완벽한 계획 같았다.
RAID가 백업이 아니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RAID가 백업은 아니었다
RAID는 여러 개의 저장장치를 하나로 묶어 사용하는 방식이다. 구성에 따라 목적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서버라면 HDD 하나가 고장 났다고 서비스를 중단하기 어렵다. 이럴 때 일부 HDD에 문제가 생겨도 계속 작동할 수 있도록 RAID를 구성할 수 있다. 가용성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반대로 많은 데이터를 빠르게 읽고 써야 한다면 여러 저장장치에 데이터를 나눠 처리해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RAID를 구성할 수도 있다. 물론 가용성과 성능 사이에서 적절히 타협한 구성도 있다. 찾아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랬다.
나무위키 RAID 문서 정리
여기까지 알아보고 나니 내가 RAID를 조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HDD 하나가 고장 나도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백업이 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RAID 안에서 파일을 삭제하거나 데이터가 손상되면 별도의 복사본이 없는 이상 원래 데이터로 돌아갈 수 없다. 내게 필요한 건 멈추지 않는 서버도, 여러 HDD를 묶은 거대한 스토리지도 아니었다. 하나가 망가져도 같은 데이터가 다른 곳에 남아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작업 공간을 백업과 분리하기로 했다
RAID까지 알아보고 나서야 오히려 내가 필요한 게 명확해졌다. 거창한 스토리지 시스템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작업하는 곳과 백업하는 곳을 나누면 됐다.

기존에는 외장하드가 작업 공간이면서 동시에 백업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작업 중인 파일은 빠른 외장 SSD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의 복사본을 별도의 HDD에 저장한다. 백업용 HDD는 항상 연결해 두지 않고 백업할 때만 사용한다. 가능하다면 같은 데이터를 또 다른 HDD에도 복사한다.
아직 다른 장소에 하나를 보관하는 것까지는 못 한다. 그러니까 완벽한 백업은 아니다. 그래도 이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게 하나 있다.
적어도 HDD 하나가 고장 났다고 해서 모든 데이터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럼, 이 구조를 만들려면 뭘 사야 하지?
가격은 기본이고, 브랜드 인지도에 리뷰까지 뒤져가며 후보를 추렸다.
필요한 건 크게 여섯 가지였다.
작업용 SSD, SSD 인클로저, 백업용 HDD, HDD를 연결할 DAS, 그리고 갑작스러운 전원 문제에 대비할 UPS. 여기에 백업을 관리할 소프트웨어까지.
DAS


FRIGO F4000U32C
마음에 들었던 OWC ThunderBay 4와 끝까지 고민하다 이걸 골랐다. 결정적인 건 슬롯별로 전원을 따로 켜고 끌 수 있다는 점. 보통 DAS는 연결하는 순간 모든 HDD가 한꺼번에 마운트되는데, 이 제품은 그걸 골라서 할 수 있었다. 이번 고장도 전기 탓으로 의심하던 터라, 이 기능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특별히 조용한 편은 아니었지만, 백업할 때만 연결할 거라 상관없다고 봤다.
SSD 인클로저


OWC Express 1M2
외부 전원이 필요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당장은 2TB면 작업 공간으로 충분할 것 같아 이 구성으로 시작해보기로 했다.
실제 작업용으로 오래 사용했을 때 발열이나 안정성은 어떨지 직접 써보면서 확인해볼 생각이다.
HDD

이번 복구 서비스를 겪으면서 HDD는 다시 씨게이트를 선택하기로 했다.
SSD

씨게이트로 가려 했는데 비슷한 스펙에 더 비싸서 삼성으로.
UPS

여러 개 찾아봤지만 APC가 제일 믿음직했다. 그만큼 비싸다는 게 함정이지만.
백업 소프트웨어

HDD 2개를 동기화해주는 소프트웨어다. 무슨 파일이 수정되고 삭제됐는지 파악해서 두 HDD를 동기화해준다. 이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제품을 고르면서 배운 것도 참 많았다. 그런데 알아보다 보니 장비 욕심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고 싶어진다.
그동안 외장하드는 어떻게 됐을까?
금요일에 보낸 HDD는 월요일에 복구 업체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씨게이트는 이메일로, 복구 업체는 카톡으로 진행 상황을 꼬박꼬박 알려줬다.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앞으로 HDD는 씨게이트다.
씨게이트 복구 서비스, 최고❤️
그리고 다음 날. 주말까지 껴서 5일 만에, 복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카톡으로 복구된 파일 리스트도 보내주는데, 찬찬히 보니 95~98%쯤 살아난 것 같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제 복구된 데이터만 받으면 된다. 마음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휴—
이제 돌아온 데이터를 다시 잃지 않을 방법을 만들 차례다. 다음에는 이번에 정한 방식대로 새로운 작업 환경과 백업 시스템을 실제로 꾸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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